발표자료를 만들었더니 별거 없어 보였다
HIPEX에서 발표를 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만들어온 Linkare 시스템 이야기를, 특히 EMR 바깥 레이어를 어떻게 쓰고 시스템으로 만들어왔는지를 말하는 자리였다.
발표자료를 만들었다. 다 만들고 나서 슬라이드를 봤는데, 별거 없어 보였다.
이게 다인가 싶었다.
근데 그 별거 없음까지, 꽤 오래 걸렸다.
처음엔 EMR 안쪽을 건드려보려고 했다
시작은 행정이었다. 재고, 인사, 기계 관리 같은 것들. 그러다 EMR과 겹치는 환자정보 쪽도 뭔가 해보려고 했다.
해보면 될 줄 알았다.
두 개의 벽에 막혔다. 하나는 법적 관리 문제. 하나는 이중입력. 환자정보를 EMR에 한 번 넣고, 내 프로그램에 또 넣어야 하는 구조가 나왔다. 실제로 해보니 이중입력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환자정보를 한 번 더 입력하라고 하는 순간, 그건 쓰는 사람의 부담이 된다.
그래서 방향을 틀었다. 환자정보는 제외한다. EMR 이외의 레이어를 체계화하고 시스템으로 만드는 쪽으로 갔다. 재고, 인사, 기계, 마케팅, 홈페이지. 환자 기록이 필요 없는 일들.
만든다고 다 시스템이 되진 않았다
여기서 솔직하게 말하면, 만든 게 다 쓰이는 건 아니었다.
직원이 매일 쓰는 화면이 있었다. 물어보지도 않고 알아서 썼다. "이건 없으면 불편해요." 반대로 내가 열심히 만든 버튼이 있었다.
"이 버튼은요?"
"아... 그건 안 눌러요."
...
쓰는 것과 안 쓰는 것의 기준은 내 노력이 아니었다. 그건 그냥 그 사람의 하루에 필요한가 아닌가였다.
그래도 어느 순간부터는 하루종일 들여다보지 않아도 됐다. 처리했다는 메모가 남고, 확인이 남고, 저쪽 병원에도 맞춰본다는 말이 오갔다. 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것도 있지만, 대체로 돌아갔다.
그러고 나니 하고 싶은 게 더 늘었다. 홈페이지 제작, GEO에 맞는 글쓰기, 네이버 블로그, 환자별 CRM. 노트북을 닫으려고 하면 새 쪽지가 또 붙었다. 왜 계속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계속 나왔다.
AI는 마법이 아니었다
이걸 다 AI로 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뭔가 마법을 상상한다.
한 번에 되냐고 물으면, 한 번에는 안 된다.
자동화할 수 있는 자리와 사람이 검수해야 하는 자리가 나뉜다. 초안은 자동으로 나온다. 그런데 확인하고, 수정하고, 발행하는 선은 사람이 그어야 한다. 100% 자동화는 현실적이지 않았다. 어디까지 자동화하고 어디까지 사람이 볼지, 그 선을 만드는 게 일의 대부분이었다.
발표자료가 별거 없어 보였던 이유가 여기 있다. 화면에 남는 건 몇 장의 슬라이드지만, 그 밑에는 이런 경계선들이 쌓여 있다.
HIPEX에서 말하고 왔다
HIPEX는 환자경험을 말하는 자리였다. 대부분 큰 병원, 행정팀, 간호팀, 교수님들의 언어였다. 나는 의원에서 온 사람이었다.
내가 생각한 해결책이 이 사람들에게도 설득력 있게 들릴까 싶었다.
발표 준비는 3월쯤 시작했다. 근데 준비를 하면서 알게 된 건, 이 발표가 새로운 일의 시작이 아니라는 거였다. 그동안 쌓아온 걸 꺼내서 다시 정리하고 이름을 붙이는 과정이었다. 행정에서 시작해 재고, 홈페이지, 블로그, CRM까지 붙였다 뺐다 보관했다 한 것들. 그중에 환자경험과 연결해 말할 수 있는 게 뭔지 골라야 했다.
그래도 내 생각을 말하는 건 늘 즐겁다.
의원의 EMR은 대학병원과 다르다
발표에서 제일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이거였다.
대학병원은 전산팀이 있다. EMR과 붙여서 만들 수 있다. 의원은 다르다. EMR 회사가 제각각이고, 나한테 API나 DB를 열어주지 않는다. A사, B사, C사. 문 앞까지 케이블을 들고 가도 꽂을 데가 없다.
그래서 EMR을 대체하려는 게 아니다.
EMR의 기능은 그대로 둔다. 진료기록과 환자정보는 EMR 안에 있어야 한다. 대신 의원에서 필요한 EMR 바깥의 것들을 하나로 묶기로 했다. 홈페이지, 유입, 블로그, 백오피스, CRM, 편지, 교육, 리텐션. 환자를 직접 보는 영역은 EMR에 두고, 그 바깥을 잇는 일이다.
그럼 상용 프로그램 쓰면 되지 않나요
발표 뒤에 자연스러운 질문이 나왔다.
그럼 홈페이지도, CRM도, 블로그도, 각자 상용 프로그램 쓰면 되지 않나요?
맞는 질문이다. 기능만 보면 이미 다 있다. 대행도 있다. 나도 한동안 그렇게 썼다.
문제는 기능이 아니라 사용이었다.
인사는 A, 재고는 B, 홈페이지는 C. 로그인이 여러 개고, 복붙이 오가고, 이건 어디서 봤더라 하는 순간이 온다. 내 경험상 UI 클릭 하나만 더 나가도 안 쓰는 판이다. 각자 기능을 가진 프로그램은 많았다. 하지만 의원의 흐름을 한 번에 묶어주는 건 잘 없었다.
행정이 그랬듯, 이 도구들도 다 파편화되어 있었다.
아직 베타와 실전 사이
지금도 끊임없이 베타 테스트 중이다. 그렇다고 영원히 베타에만 머물 수는 없다.
"내 프로그램이 쩔어요" 같은 말은 못 하겠다. 다만 의원에서 필요한 것들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적용해본다. 유입, 행정, 설명, 리텐션, 교육을 한 줄로 잇는 일.
병원 안팎에 조각나 있던 일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 일. 발표 슬라이드로 보면 별거 없어 보이는, 그 일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자주 묻는 질문
왜 EMR과 직접 연동하지 않나요?
의원용 EMR은 회사마다 다르고, 외부 개발자에게 API나 DB 접근을 열어주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억지로 환자정보를 다시 입력하게 만들면 이중입력이 되고, 그 부담은 쓰는 사람에게 간다. 그래서 환자정보를 직접 다루는 영역은 EMR에 두고, 그 바깥 레이어를 잇는 방향으로 갔다.
상용 툴을 조합해 쓰는 것과 뭐가 다른가요?
기능만 보면 홈페이지, CRM, 블로그, 업무관리 도구는 이미 다 있다. 문제는 그것들이 흩어져 있다는 점이다. 로그인이 여러 개고 도구 사이를 복붙으로 오가야 하면, 클릭 한 번 차이로 안 쓰게 된다. 의원의 흐름을 하나로 묶어 사용 마찰을 줄이는 게 핵심이다.
AI로 만들면 자동으로 다 되는 것 아닌가요?
아니다. 초안 생성처럼 자동화가 잘 맞는 자리가 있고, 확인과 수정과 발행처럼 사람이 검수해야 하는 자리가 있다. 100% 자동화는 현실적이지 않고, 자동화와 사람 검수 사이의 경계를 잘 긋는 일이 실제 작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