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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떨결에 의원행정 SaaS 만들기 이야기 — 8편

권진열
4분 읽기

클로즈드 베타, 첫 온보딩

4월 초. 드디어 외부 병원에 처음으로 세팅하러 올라갔다.

나름 준비를 했다. 이렇게 설명하고, 이 순서로 보여주고, 이건 나중에 얘기하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도 돌렸다. 우리 병원에서 한달 넘게 알파를 돌렸으니까, 어디를 먼저 보여줘야 하는지 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하지

앞에 앉으니까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만든 사람이다. 하나씩 기능을 붙이면서 맥락이 쌓였다. "이 버튼은 왜 여기 있는지", "이 화면 다음에 뭘 해야 하는지"를 설명 없이 안다. 내가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처음 보는 사람은 다르다. 로그인하고 대시보드가 나오는 순간부터 "이게 뭔가요?"다.

내가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것들 — 메뉴 구조, 용어, 입력 순서 — 이 전부 설명이 필요한 것들이었다. 3개월 동안 쌓인 내 지식이 오히려 방해가 됐다. 상대방의 눈높이를 모르겠는 거다.

첫날부터 버그

설상가상으로 시연 중에 버그가 터졌다.

모바일에서 자동 비밀번호 설정하는 부분. 우리 병원에서는 문제없이 돌아가던 플로우였다. 근데 새 계정으로 처음 세팅하는 상황에서 엣지 케이스가 있었다.

화면이 멈추고, 다시 시도하고, 또 안 되고. 옆에서 지켜보는 상대방 얼굴이 미묘하게 변하는 게 느껴졌다.

"잠시만요, 금방 고칠게요." 이 말을 하면서 느꼈다. 내가 만들어서 내가 쓸 때는 버그가 나와도 "아 이거 고쳐야지" 하고 넘어간다. 남 앞에서 터지면 그게 곧 신뢰도다.

7편에서 "깎여야 쓸 수 있다"고 했는데, 덜 깎인 부분이 가장 안 좋은 타이밍에 드러났다.

데이터를 누가 넣는가

시연이 어떻게든 끝나고, 실제 세팅에 들어갔다.

여기서 두 번째 벽을 만났다. 데이터 입력.

우리 병원은 내가 직접 넣었다. 원장이니까 어떤 데이터가 어디에 들어가야 하는지 안다. 약품 목록, 직원 정보, 진료 항목, 재고 기초 데이터. 이걸 내가 하나하나 채웠기 때문에 시스템이 돌아간 거다.

근데 다른 병원 원장한테 "여기에 직원 정보 넣으시고, 여기에 약품 넣으시고, 여기에 거래처 넣으시고…" 하니까 표정이 굳더라.

당연하다. 원장은 진료를 하러 온 거지, 행정 데이터를 입력하러 온 게 아니다.

온라인 SaaS처럼 "가입하면 바로 쓰세요"가 안 되는 거다. 데이터가 없으면 빈 껍데기고, 데이터를 넣으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그 시간과 노력을 고객한테 전가하면 안 쓴다.

의료 B2B가 설치비를 받는 이유

이때 퍼즐이 맞춰졌다.

의료 쪽 B2B 솔루션들이 왜 다 설치비를 받는지. 왜 영업사원이 직접 가서 세팅을 해주는지. 왜 초기 데이터 마이그레이션이 별도 서비스인지.

그게 다 이유가 있었다.

셀프서브 SaaS는 사용자가 이미 그 도메인의 디지털 도구에 익숙할 때 성립한다. 슬랙을 쓰던 사람이 팀즈로 갈아타는 건 자기가 알아서 한다. 그런데 종이랑 엑셀로 행정을 해오던 10인 의원에서 처음으로 시스템을 도입하는 건, 그 자체가 변화 관리 프로젝트다.

가입 링크를 보내고 "해보세요"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새 개원 병원의 아이러니

게다가 이 병원은 개원한 지 얼마 안 된 곳이었다.

나는 "새 병원이면 레거시가 없으니까 오히려 세팅이 쉽겠다"고 생각했다. 기존 시스템에서 마이그레이션할 것도 없고, 처음부터 깔끔하게 시작할 수 있으니까.

근데 반대였다. 행정적 고통이 아직 없었다.

개원 초기에는 환자가 적다. 직원도 적다. 재고도 적다. 엑셀이든 종이든 어떻게든 돌아간다. "이거 없으면 안 돼요"라는 절실함이 없는 거다.

통증이 없는 사람한테 진통제를 파는 격이었다.

우리 병원은 6년차다. 직원이 늘고, 환자가 늘고, 약품이 늘고, 관리가 복잡해지면서 "이건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고통이 충분히 쌓여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만든 게 바로 쓸모가 있었던 거다.

결론: BM을 바꿔야 한다

올라가면서 생각을 많이 했다.

첫째, 온보딩은 내가 다 해줘야 한다.

데이터 입력, 초기 설정, 직원 계정 생성. 이걸 고객한테 맡기면 안 된다. 내가 가서, 혹은 원격으로, 기초 데이터를 전부 세팅해주고 "바로 쓸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줘야 한다. 그게 설치비고, 그게 서비스다.

둘째, 새 개원 병원은 천천히.

진료가 궤도에 오르기 전에 행정 시스템을 밀어넣는 건 무리다. 한두 달 진료를 하면서 행정의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할 때, 그때 들어가는 게 맞다. 급할 것 없다.

셋째, 온라인 SaaS의 환상을 버려야 한다.

"가입하면 알아서 쓰는" 모델은 최소한 의료 행정 도메인에서는 안 먹힌다. 손을 더 대야 한다. 내가 더 뛰어야 한다. 그게 현실이다.

멋진 대시보드도, 깔끔한 UI도, 결국 데이터가 없으면 빈 화면이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채우는 건 코드가 아니라 사람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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